박찬욱을 위하여... (영화 아가씨)
박찬욱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한마디로 정의해 보자면, 박찬욱의, 박찬욱에 의한, 박찬욱을 위한 영화다. 지극히 박찬욱 감독다운 박찬욱의 영화이며, 박찬욱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박찬욱의 영상미를 담은 영화이며, 박찬욱을 위한 박찬욱의 자유로운 영상 세계를 마음껏 펼친, 박찬욱표 종합선물 세트라 말할 수 있겠다. 충분히 재미있고, 충분히 자극적이며, 충분히 잔인하다. 박찬욱이 아니면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에게 있어서 거장이라는 극대화 된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영화란 무엇인가를 확실히 보여준다. 게다가 전혀 흠잡을 데가 없는 치밀한 플롯은, 영화 중간중간에, 예상을 뛰어 넘는 충격적 반전을 여러 차례나 선사한다. 왜 전 세계 영화인들이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는지는, 영화 ‘아가씨’ 하나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전 세계 누가 봐도 어렵지 않게 공감 할 수 있는, 친절함이 돋보인다. 그만큼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 박찬욱의 영화는 대한민국을 뛰어넘어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있다.
영국작가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아가씨’는 현재 언론 및 미디어를 통해서 동성애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잘 못 된 확대해석이다. 물론 영화 내용이 두 여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동성애 장면도 꽤 여러 차례 나온다. 하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동성애를 주제로 한 영화는 아니다. 동성애를 소재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페미니즘적 성격이 강한 여성 해방적 영화다. 언론과 미디어가 지나칠 정도로 자극적인 장면만을 강조하여, 동성애 코드만 부각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자칫하면 관객들에게 영화적 편견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두 여자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을 뛰어넘어, 사랑의 단계로 갈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당시 사회적, 시대적, 그리고 주인공들의 주변 배경들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아무리 원작이 동성애적 작품성격이 강했다 하더라도, 영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연출과 해석은 충분히 달리 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이 동성애 장면 연출에 큰 공을 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 전체적 그림은 기존에 억압된 남성 사회에 반기를 든, 여성 해방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 영화의 처음은 가짜 백작(하정우 분)이 소매치기 소녀 숙희(김태리 분)에게 접근하여 솔깃한 제안 하나를 던지면서 시작한다. 가짜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인 숙희는, 거금을 손에 넣기 위해, 거대 상속녀 히데코(김민희 분)의 하녀로 들어가게 되고, 그 후에 배신에 배신,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면서, 영화는 전혀 예기치 못한 결말로 치닫게 된다.
거대 상속녀 히데코는 일찍 부모를 잃고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되지만, 후견인인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 분)의 성적학대를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게다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이모(문소리 분)마저도 남편의 학대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나무에 목을 매달고 자살을 하게 된다. 이후 이모가 하던, 귀족 남자들에게 야설을 읽어주는, 일을 물려받게 된 히데코는 이모부에게 철저히 유린되고 양육되어 지면서, 귀족남자들의 성적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히데코가 이 지긋지긋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모와 똑같이 나무에 목을 매달고 자살을 선택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가짜 백작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숙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이 두 여자의 미래를 바꿔 놓을, 운명의 첫 만남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여성이 운명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 남성들의 소유물로, 그들이 그리고 있는 성적 세상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다. 히데코의 소문이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귀족들의 가십거리가 되어 있을지언정, 누구 하나 그녀를 위해 흑기사가 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먼 길을 달려와, 자신들의 성적 대리만족을 위해, 그녀를 도구로 사용했다. 더군다나 히데코는 이모부와 정략결혼에 놓여 있는 상태다. 이것 역시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이모부는 히데코와의 결혼으로 막대한 유산을 가로챈 뒤, 값비싼 야설을 구입하려고 한다. 이는 결국 히데코에게 벗어날 수 없는 올무 하나를 더 제공해 주는 격이다. 서재에 야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녀는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성적 지옥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여자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결혼을 하고 나면 남편의 소유가 되는 세상, 그리고 남편에 의해 언제든 정신병원에 감금 될 수 있는 세상, 이곳이 바로 히데코와 숙희가 살고 있는 세상인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히데코가 가짜 백작이 아닌 숙희를 선택하게 한다. 가짜 백작 역시 처음에는 히데코의 재산을 보고 접근했지만, 나중에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히데코의 재산을 거머쥔 뒤에도, 그녀와 진짜 결혼을 원한다. 하지만 히데코는 결국 숙희를 선택한다. 만약 히데코가 숙희가 아닌 가짜 백작을 선택했다면, 이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해방이다. 여성 스스로는 자신들을 절대 구원해 낼 수 없고, 반드시 남성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는 반페미니즘적 결말이 된다. 이런 남성에 의한 해방은, 남성이 변심하면 언제든 다시 과거로 회귀 될 수 있는 불완전한 해방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매일 접하는 막장드라마를 보면, 모두 남성에 의한 여성의 신분상승 내용이다. 아무리 훌륭한 여주인공이라 하더라도, 그 잘난 실장님, 본부장님 없이는 스스로 홀로 설 수 없다. 악녀에게 복수조차 할 수 없는 구조다. 이렇게 보면 현대의 사회도 과거의 사회와 크게 달라진 바는 없다. 계속해서 방송매체에서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구원만을 얘기하고 강요한다. 그런 막장드라마의 주 시청 층인 여성들은 미디어에 세뇌 되어 매일같이 백마 탄 왕자님만을 꿈꾼다. 결국 남자들을 돈과 지위로만 가늠하게 만들어, 된장녀와 김치녀만을 양산시키게 되었다. 이는 남성들에게도 여성혐오라는 비정상적 병을 퍼트리게 하여, 사회적 악순환만 야기 시키고 있다.
하지만 영화감독인 박찬욱은 남성에 의한 불완전한 해방을 선택하지 않았다. 히데코가 숙희를 선택하게 함으로서, 여성이 주최가 되는 진정한 해방을 이루게 했다. 비록 일본을 무사히 빠져나가 꿈의 이상향인 블라디보스톡으로 가기 위해서, 히데코가 잠시 남장을 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감독은 거기에 남성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는 기존 사회의 삼엄한 경계와 감시를 뚫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부여한 남성성이다. 그녀들이 무사히 자신들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히데코는 과감히 남장을 벗어버린다. 그리고 다시 여자로 되돌아간다. 성애 장면만 보더라도, 그녀들은 절대 성을 구분시키지 않는다. 동등한 위치에서 동등한 행위를 함으로서, 그녀들은 여자 대 여자로 상대를 구원시키게 된다. 이점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일반 동성애 영화와 다른 점이다. 일반 동성애 영화처럼 같은 성별끼리도 성을 구분 짓지 않음으로서, 진정한 여성 스스로의 해방을 표현했다. 만약 여기서 성을 구분 지었다면, 이 영화는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같은 성별 내에서 또 다시 성을 나누게 되면서, 다시 남성성에 의한 불완전한 구원이 될 수도 있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는 그동안 박찬욱의 영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준 패키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일본적 색채와 화려한 영상은 영화 ‘올드보이’를 닮았고, 숙희의 지인들이 숙희를 구해내는 장면에서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그리고 누구와 작당을 해서 누구를 해코지 하려는 음모와 배신을 꾸미는 내용은 영화 ‘박쥐’와 흡사하다. 그리고 억지스럽지 않은, 진정한 반전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보여준 영화라 생각 된다. 여러 차례 충격적인 반전에 반전을 거듭할 때는, 정말 박찬욱의 진가를 유감없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칠 정도로 야동스러운 성애 장면과 조진웅이 하정우에게 가한 신체절단 장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다소 거북스러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야말로 진짜 박찬욱만이 그릴 수 있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인 것을...
아차!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가씨’를 보고 있으면 한국 영화인지 일본 영화인지 전혀 구분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이 보는 눈에도 그러한데, 외국인들의 눈에는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 한국 문화를 일본 문화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생기긴 한다. 완성도 높게 잘 만들어진 한국의 유산을 일본의 것으로 오해를 한다면, 매우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일본이 세계 문화의 주류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문화적으로 많은 손해를 입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박찬욱 감독이 일본 여인인 히데코를 구원하려는 구원자를 한국인인 가짜 백작과 숙희로 설정했다는 것은, 다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그래도 다음에는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영화를 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몽골인 여인을 구원해 만주벌판과 서역으로 도망을 치는 내용으로 말이다. 영화 평 끝에 엉뚱한 상상을 잠시 해본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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